‘n분의1’, 형제자매 평등상속은

 




‘장남=1.5, 아들=1, 딸(기혼)=0.25, 딸(미혼)=0.5, 부인=0.5′(1960~1978)
‘장남=1.5, 아들=1, 딸(기혼)=0.25, 딸(미혼)=1, 부인=1.5′(1979~1990)
‘장남 = 1, 아들 = 1, 딸 = 1, 아내(생존) = 1.5′(1991년부터)
대한민국 민법에서 정한 기간별 상속비율입니다.

1991년 버전의 독일 민법 섹션 1009(1)에 따라 아버지가 사망하면 모든 자녀는 1/n을 상속받고 (살아 있는) 어머니는 0.5를 더 상속받습니다.


그러나 1990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큰아들과 어머니는 각각 1.5씩, 둘째(남녀)는 각각 1개씩 받았지만, 가출한 딸의 경우 방치됐다.

그는 다른 아이들의 4분의 1인 0.25만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산의 개선된 분할이었다.


민법이 제정된 1960년부터 1978년까지 18년 동안 성차별과 장남 우대는 더욱 두드러졌다.

장남은 1.5점, 차남과 차남은 각각 1점씩 받았다.

그러나 모녀는 각각 0.5점, 옷을 벗은 딸도 0.25점에 그쳤다.


장남이 제사를 지내고 가족을 책임진다는 인식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딸=외자’라는 생각이 강했다.

55년 전(1978년) 50만 명이 남편(아버지)과 평생을 함께하며 가정을 꾸려온 아내(어머니)에게 분배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n의 계승,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전통
김미영 선임연구위원의 “이재령의 분재기(1688)” 자료 및 논문과 저서(), 국립유산연구원 예술유산연구부에서 발간한 이아름 큐레이터는 “평등한 사회, 분단을 통한 실현” 등의 글을 통해 부의 상속사를 살펴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한민국 민법은 33년 전만 해도 ‘등가상속’을 도입해 ‘n자녀 중 1명’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1 in n” 상속이 적어도 700년 전 고려 시대부터 뿌리 깊은 전통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증거를 드립니다.

1343년(충혜왕 4) 고려 말의 관리 윤선좌(1265~1343)가 자식들을 모두 모아 재산을 균등하게 나눈다는 문서를 작성하고 훈계를 남겼다.


“네 형제가 서로 화목하고 다투지 아니함을 네 자손에게 가르치라.”




이 공평한 분배와 관련하여 700년 전 고려시대에 ‘솔로몬의 심판’을 볼 수 있다.


즉, 경상도 안찰감사 시절 재산분할과 관련된 형제간 소송을 해결한 손변(?~1251)의 내용이다.


소송은 남동생이 “누나와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 누나는 어떻게 부모님의 재산을 독점했느냐”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때 누나의 항의가 흥미롭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모든 재산은 나와 그의 딸, 그리고 너(남동생)에게 분배되었고 치과 기구, 면류관(승려와 유학자들이 착용하는 옷과 면류관), 미투리 한 쌍만 주었다.

샌들)과 양지.”
소송은 수년 동안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손변 경상도 안찰지사는 두 사람을 불러 심문했다.


“아버지가 유언장을 남겼을 때 어머니는 살아 계셨습니까?”(손변)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형제자매) “그때 형제들은 몇 살이었습니까?”(손변) “언니는 이미 결혼했고 동생은 오빠였습니다.

어렸어, 꼬마였어.” (형제자매)




두 사람의 진술을 들은 손변의 평결은 “솔로몬의 지혜”였다.


“어찌하여 부모가 시집간 딸(누나)을 우대하고, 부모 없이 홀로 남겨진 동생(동생)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동생을 돌보는 유일한 성인 자매가 아닐까요? 그러나 소유권을 “반반”으로 균등하게 나누면 어떻게 될까요?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될 언니가 동생을 방치한 건 아닐까. 아버지가 그걸 걱정하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생깁니다.

아버지는 왜 작은 아들에게 “치과, 치아, 미투리, 종이” 같은 보잘 것 없는 것들만 남겨두었을까?
손변의 최종 판결문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봅시다.

“동생이 크면 아버지가 남긴 종이로 하소연을 써서 치과의사, 치관, 미투리로 장식하고 관공서에 신고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가 형에게 딱 네 가지만 남기고 간 건 그런 뜻이었다”고 말했다.


손변의 판결에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울었고, 결국 재산을 반으로 나누었다.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1342~1398)이 부친(정운경, 1905~1366)에게 유산을 물려받자 “젊고 힘센 신하들을 연하로 나누어 , 그리고 그는 늙고 약한 하인만을 데려갔습니다.

” ( “부착”).
이것을 딸과 아들이 공평하게 나눈다면 제사는 누가 책임지는가?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부모의 혈통을 성전에 안치하고 재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제사 비용은 자녀들이 분담했다.

제사비용도 부의 균등분배 원칙에 따라 분담했다.


재산분할의 역사는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343년(충혜왕 4) 고려 말의 관리 윤선좌(1265~1343)가 그의 자식들을 모두 모아 재산을 균등하게 나눈다는 문서를 작성하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 형제가 서로 화목하고 다투지 말라.” ( ‘열전 윤선좌’) 유언을 남깁니다.

119명의 노예를 분배한 이율곡 가문의 후계자
조선시대는 어땠나요? 요컨대 “남녀평등의 원칙”은 17세기경까지 적용되었다.


‘형전·사춘조’에는 “부모가 생전 분담하지 않은 노비는 자식의 출생과 상관없이 분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노예뿐만 아니라 토지 및 주택과 관련된 상속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유명한 상속 증서인 “율곡 이이 분재(상속 증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566년(명종 21) 5월 20일 율곡 이이(1536~1584)와 7남매(4남 3녀)가 모였다.


아버지(이원수, 1501-1561)와 어머니(신사임당, 1504-1551)의 재산이 나누어진 곳이었다.

형제는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부분을 따로 떼어 놓고 나머지는 아들과 딸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셋째 아들 율곡 이이는 논 8개와 밭의 일부와 노비 15명을 돌려주었다.

유산이 아버지(이원수)의 첩에게 돌아갔다는 점도 흥미롭다.

119명의 노예가 4남 3녀에게 물려받은 것도 놀랍다.

특히 노비의 경우 명을 쓰지 않고 구와 다르게 표현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재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율곡 가문의 노예 수는 아마도 서울, 파주, 영천, 강릉에 거주하는 독거노예와 솔거노예의 합일 것이다.


고려 말 손변(?~1251)은 경상도 안찰 관찰사로서 상속재산을 둘러싼 형제자매 분쟁을 깔끔하게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 안에 “열정과 손의 변화”, “솔로몬의 심판”에 해당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빠를 잘 챙겨주는 놈까지..’
성차별 없는 재산분배의 원칙은 『부안 김씨가 소장한 고문헌』에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고대 문서 중에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기록된 가족 이산 기록이 28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1581년(선조 14)에 진주 강씨 강주신이 쓴 『분재기』를 보자.
원칙은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재기에는 강주주가 여러 아이들을 설득한 것이 있었다.

첩의 아들 어롱의 이야기다.


에롱은 강주신의 아들이었지만 신분은 ‘노예’였다.

아버지는 양반(강주신)이었지만 어머니는 다른 집을 소유한 하녀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노비이면 아버지의 신분과 상관없이 조선 국법상 노비가 된다.


이로 인해 ‘어롱’은 노예 어머니의 주인(서울)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남은 음식을 받게 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강주신)는 아들(개자식)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간첩(첩의 아들) 어롱은 윗사람을 모시느라 서울에 있는 주인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9개의 논을 주고 그들에게 “팔아 그들의 삶에 기여하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어롱은 임시로 서울의 기와집 10칸짜리 집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이 기와집을 모아서 재산분할에 포함시키시오.”
사생아의 혈통과 관련하여 부안김씨의 한 분파에서 흥미로운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즉, 1588년(선조 21) 부안 김씨 김개라는 사람이 사생아이자 막내아들(김경수)에게 노비를 허락하는 문서를 교부한 것이다.


“내가 지병으로 오랫동안 누워 있을 때에도 너희는 옷의 띠를 풀지 아니하였고 밤낮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항상 경건함으로 술을 대접하였느니라… 여종과 그 자손은 영원히 주느니라.”
그 결과 기혼 남성이 처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했다.


앞서 언급한 강신주의 사위인 김경순(부안김씨)이 대표적이다.

1581년 시아버지 강신주의 재산 분배에 따르면 김경순은 노비 2명과 쌀 60포대 3개를 받았다.

그런데 17년 전인 1564년(명종 16) 분재기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등장한다.


즉, 김경순이 강주신의 딸과 시집가는 날에는 이미 시아버지로부터 논 14채와 노비 1명을 받은 상태였다.

시아버지는 딸과 사위에게 ‘큰 결혼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당시 김경순 역시 처삼촌(강주보)에게 논 16개를 받았다.


아니, 외삼촌(강주보)마저 재산을 조카(김경순)에게 물려줬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있었다.


외삼촌인 강주보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부부는 삼촌 강주보와 함께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삼촌은 기꺼이 그에게 16개의 논을 보상으로 주었다.




■ 제사를 끝내라?
1668년(효종 8) 부안 김씨 김명열 부부가 뜻밖에 재산을 물려받았다.


김명열의 처(이전주)가 자식이 없는 외삼촌 집에서 자라면서 외삼촌 부부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다.


이후 홀로 남겨진 이모는 조카딸과 조카들에게 “지난 40년 동안 나(이모)를 보살피고 남편(삼촌) 제사를 지켰다”며 기꺼이 유산을 물려주었다.

생양(生養)과 봉사(死祀)의 이야기다.


이것이 상속을 통한 재산 분배의 정당성이었다.

유산에는 “나 자신을 잘 돌보고 살았다”는 감사와 “죽은 후에도 장례를 준비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에서 등제사는 누가 맡았는가? 과연 장남의 몫이었을까?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상속 재산의 5분의 1을 더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중후반에도 조선에는 “자식이 번갈아 가며 제사를 지내는” “윤행(輪行)”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 무신 이문건(1494~1567)의 일기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545년 음력 1월 15일 = 어머니의 날. 제사는 누나네 집에서 하는데… 기름은 제사를 지내는 데 쓰였다.


의성 김씨 청계 종가 분재기(1671년)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섯 형제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번갈아 가며 조상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율곡 내가 외가에서 자란 이유
딸과 아들을 구별하지 않고 재산을 분배하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관습에 따라 ‘부인의 집에 동거’하는 일도 흔했다.


이는 여성이 여성의 가족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여성의 가족을 돌보고 여성의 가족의 제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의 인물인 유희춘(1513-1577)은 “그는 부모를 위해 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외조부모, 외조부모, 시댁에도 제사를 지냈다”고 말했다.

” (). 또 다른 예는 율곡 이이입니다.

이나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나고 자랐다.


원래 오죽헌은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외가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다섯 딸을 둔 사임당의 아버지(신명화, 1476~1522)가 죽자 재산이 분할되었다.

이에 오죽헌은 “무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넷째 딸의 아들(권처균)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신사임당(차녀) 아들(이율곡)에게 “조상 제사를 지켜달라”는 부탁으로 서울에 있는 집과 밭을 받았다.




■큰아들과 ‘놀랐다’…
이러한 관행은 17세기 중후반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1669년(현종 10) 부안김씨 김명열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언에 중요한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가장법이 무너진 지 오래됐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관습이 되었습니다.

딸들이 외출하고… 사위가 제사를 지킨다… .”
여기서 무너졌다고 하는 ‘상족법’은 ‘장남 중심의 가정법 체계’를 의미한다.

17세기 조선에서 의례학이 발달하면서 ‘장자지향’이라는 유교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균등분배’와 ‘제사지내기’라는 뿌리 깊은 관행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명열은 여기에 타협점을 제시한다.

즉, 부모의 제사는 아들이 번갈아 가며 행하는 것이지 딸에게 “헌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이사간 딸들에게 아들 몫의 3분의 1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과도기를 거쳐 18세기 말 장남이 독신으로 일하면서 상속재산은 상속이 거의 독점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것이 1779년(3.
이 문서에 따르면 장남 김정열은 노비 74명, 논 15개, 논 5개, 논 8개, 죽밭 1개, 밤나무 밭 1개, 서원 터를 물려받았다.

반면 집을 나간 두 자매와 미혼 남동생 2명은 각각 10~15개만 나눠 먹었다.


아무리 장남으로서 제사에 능하다 해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못된 빵’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재산의 대부분은 제사와 동성(집성촌) 마을의 건립 및 유지를 위해 준비되었다.

그러므로 장남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김정열이 처분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은 장남의 몫인 12밭 5형제들이었다.


그렇게 보면 좀 엉뚱한 장남의 유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남은 가족을 지키는 의무, 즉 의무를 짊어진 대가로 “더 많은 부”를 받았기 때문에… .




■ 재산 상속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돌이켜보면 상속의 장자상속과 성차별은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관행이다.


33년, 55년 전만 해도 뿌리 깊은 전통처럼 대한민국 민법에 근래의 풍습이 새겨져 있었다.

적어도 400년 전 고려시대부터 시행된 남녀평등의 원칙을 무시하고… .
이번에는 조선시대 본재기를 보면서 새로운 것을 느꼈다.

재산분할 정신입니다.


부모는 살아 있을 때 갚아야 할 돈을 잘 갚고 죽어서 제사를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식에게 주었다.


나는 부모의 자식일 뿐이므로, 부모의 재산은 당연히 내 것이 될 것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불법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기 전에 부모의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에서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
1486년(성종 17) 11월 8일, 효령대군의 세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관에 넣자마자 재물을 급히 내주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았다.

범죄는 잔인한 공격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를 위해 3년을 상한 뒤에야 재산을 분배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나는 장례식에서 형제자매들이 추악한 재산 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 이후에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까? (이 글을 위해 한국학진흥원 김미영 선임연구원,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아름 학예연구위원, 박도식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박제 -광 건국대학교 박물관 학예원장이 팁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 이기환 스토리텔러 


김미영, 민속센터, 2012
문숙자, “조선후기 균등상속의 균열과 후대상속관행”, 제39호, 한국학진흥원, 2009
박도식, ‘율곡 남매의 연구’, 10권, 율곡학회, 2005
이아름, 분재기를 통해 실현된 평등사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과, 2023
전목, “분재기를 통한 분재와 자원봉사의 변천 – 부안김씨 고문서를 중심으로”, 22권, 고문헌학회, 2003
정구복, 일료각, 2004